Work Text:
엘제 뮐러린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아니, 고통스러웠나? 적어도 그녀는 겨울이나 흉작이 들었을 때 배를 곯지 않았다. 첫 아이는 말을 떼는 것이 느렸지만 무사히 돌을 넘겼다. 남편은 마을에서 두 말할 것 없는 부자였다. 그녀는 소작농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유리창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렌하르트는 그녀에게 항상 언짢은 말투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너는 복 받은 줄 알아. 소작농 같은 벌레들의 자식이랑 결혼할 바에는 마을에서 뿌리 있는 가문의 여자랑 결혼한 거니까. 뭐, 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카뷔에젤 가문이 영영 사라지긴 했지.'
'저 아래에 멍청하고 더러운 족속들을 봐. 또 값을 어쩌고 저쩌고 지랄을 하면서 내 성질을 긁어대겠군.'
'이 쓸모없는 년아. 안주인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게 무슨 아이를 키우겠다고 난리야? 파울 저 놈이 저렇게 사내답지 못한 건 다 니 탓이야.'
그때마다 엘제는 부군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해요'라는 말은 신혼 때나 먹혀들어가는 사과였다. 이제 그녀의 입에서 사과가 나오면 렌하르트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멍청한 년이, 말할 수 있는 게 '죄송해요'밖에 없어? 제대로 나아져야 할 것 아냐, 씨발..."
엘제는 입을 꼭 다문 채 눈을 크게 뜬 아이의 귀를 살포시 막았다. 아, 불쌍한 내 아가. 못난 어미 때문에 너에게 나쁜 영향만 주는구나.
"어디서 애 귀를 막아? 아버지 훈육은 듣지도 말라 이건가?"
결국은 손찌검이 날아왔다. 파울은 렌하르트의 바짓자락을 잡고 울었다. "아버지, 엄마 때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렌하르트의 손이 파울에게도 올라가는 순간, 엘제는 아이를 제 뒤로 숨겼다.
"여보, 죄송해요. 제가 더 잘할게요. 파울도 죄송하다고 하잖아요. 렌하르트, 제발요.."
엘제 뮐러린의 삶은 행복했다. 적어도 배는 곯지 않았으니. 비가 새지 않는 집이 있었으니. 어린 나이에 요절한 아이가 없었으니.. 그 때문에 부군의 폭언과 폭력에도, 엘제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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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하르트가 무역을 하려 며칠 집을 떠났을 때였다. 엘제는 집 2층 유리창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볼에 들었던 새파란 멍이 이제는 약간 노란 정도로 가라앉았다. 조만간 아그네스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엘제는 선반 위에 놓인 연고를 보며 생각했다. 무심코 밖을 쳐다보니 파울이 어떤 젊은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타싱에 위험한 짓을 할 만한 인물은 없지만, 그 사람은 처음 보는 이였다. 엘제는 조급하게 걸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저는 화가가 되고 싶어요."
"그거 멋진데. 넌 꼭 최고의 예술가가 될 거야. 아저씨 말을 믿어도 된단다."
엘제는 문을 살짝 열고 둘을 쳐다보았다. 파울은 평소와는 다르게 들뜬 모습으로 낯선 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이에게 시선을 맞추며 무릎을 꿇고 있는 저 낯선 사람은 이번에 수도원에 작업을 하려 온 사내였다. 게르트너 가족의 집에서 묵고 있다는..
"미래의 장인님께 미리 선물을 해야겠는걸."
남자는 작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작은 막대기를 파울의 손에 쥐어주었다.
"연필이다. 내가 살던 뉘른베르크에서 많이 볼 수 있지."
"어.. 이거 저 가져도 돼요?"
"아버지한테 뺏기지만 말아라."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파울은 배시시 웃으며 로마 유적지로 달려갔다. 아마 새로 받은 연필을 사용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 부인께서는 절 바라보시는 이유가?"
"아.."
젊은 사내는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구와는 다르게 그녀보다 반 뼘은 컸다. 선이 얇으면서도 사나운 얼굴을 가진 렌하르트와는 달리, 그는 짙은 선을 가졌음에도 부드러워 보였고 심지어는 연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내는 방앗간을 휘 둘러보다가 다시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예술가 안드레아스 말러입니다. 게르트너 가족들 집에서 하숙하고 있고, 수도원에서 작품을 그리고 있어요."
"엘제 뮐러린..이라고 해요. 제 부군이 이 방앗간 주인입니다. 그, 죄송해요, 쳐다보고 있던 건 단지.. 뭐랄까, 저희 아들이 내성적인데.."
엘제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렌하르트와 파울 이외의 남자와 대화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사실 애초에 마을의 부녀자들과도 대화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아그네스나 헤디, 클라라와는 어색했다. 그녀들이 엘제를 챙겨주려 했음에도 그녀는 그들의 호의를 맘 편히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페로니카나 브리기타는? 그 둘은 너무 어렸다. 결혼을 생각하기보단 저들끼리 놀러 다니는 게 더 재밌는 소녀들이었다. 남은 건 에바인데, 글쎄. 그녀의 남편이 에바에게 집적대는 걸 멈추지 않는 이상은 친해지기엔 껄끄러운 사이였다.
안색이 파리해진 엘제를 본 안드레아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부인? 괜찮으신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말도 없이 자제분과 대화를 했네요. 파울이 예술에 관심이 많아 보여서 같이 얘기를 한 것뿐이랍니다."
"아.. 네. 전 괜찮아요. 그냥.. 남이랑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라서요. 부군과 아들 빼고는요."
"이런, 그렇다면 제가 말동무가 되어드리는 것도 괜찮겠네요."
안드레아스는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엘제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자, 그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살갑게 웃어 보였다. 엘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가 두드린 자리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았다. 렌하르트가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 것이 다행이었다. 그였다면 파울과 엘제가 쉬는 꼴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엘제라고 불러도 될까요?"
"안 돼요! 남편이 싫어할 거예요. 그이는 싫어하는 게 워낙 많아서.."
안드레아스는 멋쩍게 웃는 엘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불만이라는 듯이,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엘제의 마음 한 구석에서 공포가 밀려들어왔다. 아, 낯선 사람을 함부로 믿어선 안 됐는데.
"부인의 부군 의사를 물어본 게 아니라서요. 저는 뮐러린 부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만약 이름으로 불리는 게 단순히 싫으시다면 존칭을 쓰겠지만, 그 이유가 부군이 싫어해서라면... 저는 당신을 엘제라고 부르고 싶네요."
그건... 처음이었다. 마을에서 평판이 나쁘기로 유명한 렌하르트 가문에 시집을 갈 때도 늙은 아버지는 그녀에게 '최선이다'라는 말만을 되뇌었다. 렌하르트는 당연했다. 그 아무도 그녀에게 무언가 질문하지 않았다. 답을 하지 않거나, 명령을 하거나. 그런 대화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걸까. 단순히 이름을 불러도 되냐는 질문에도 머뭇거려졌다.
"..그럼 렌하르트가 오기 전까지만요. 그가 돌아오면 다시 뮐러린 부인이라 불러주세요."
"부군 성함이 렌하르트 뮐러신가보죠? 피에르에게 몇 번 들은 적 있습니다."
그는 느릿하게 돌아가는 풍차의 날개를 잠시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는 시간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바람소리, 저 아래 밭의 쟁기소리, 로마 유적지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파울의 소리, 마을 공용 구역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대장간 소리.. 처음 보는 남자와 같이 들판에 앉아있는 게 어색할 법한데도, 엘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다만 그 모든 순간들이 그림처럼 기억에 선명히 남고 있었다. 안드레아스의 고운 미성이 귓가에 울렸다.
"저는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마을을 가봤습니다. 타싱만한 곳이 없더군요."
"그거 멋지네요, 안드레아스. 세상을 여행한다는 건... 제가 감히 꿈꿀 수 없는 일이죠."
"엘제, 당신도 꿈꿀 수 있어요.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죠. 그리고 언젠가는 이뤄질 겁니다. 사람의 의지는 그런 것이니까요."
"..그런가요?"
"당연하죠." 그렇게 말하면서 안드레아스는 씩 웃어 보였다. 그의 보조개가 파였다. 산들바람이 불었다. 새파란 하늘 위로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그의 긴 갈색 머리카락은 바람결을 따라 이리저리 흩날렸다. 엘제의 머리쓰개가 휘날렸다. 풀의 녹음은 짙고, 잔잔하게 들리던 소음은 조용해졌다.
난생처음이었다. 누군가가 그녀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 주는 일이.
안드레아스는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주섬거리며 꺼냈다. 엘제는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해방감? 서러운 게 폭발한 걸까?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 딸로 사는 것이 아닌.. 엘제 카뷔에젤로 살아가는 게.. 이런 기분이었을까.
"저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걸 좋아해요. 그 사람의 삶과 성격을 알 수 있죠. 그리고 그걸 그림에 담는 걸 좋아합니다. 몇몇 이들은 제가 말이 너무 많다고 하지만요."
안드레아스는 말을 이으며 종이에 무언가를 그렸다.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바라보자, 엘제는 눈을 황급히 밑으로 내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순식간에 흐르던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모델이 긴장한 것을 아는지, 안드레아스는 스케치를 계속하면서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사소한 것들이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나요?', '좋아하는 색은요?', '어린 시절엔 뭘 하며 지내셨나요?' 엘제는 치마 끝자락에 풀물이 드는 것을 바라보며 그 모든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몇 번의 사각거리는 소리, 침묵.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쳐다보면 엘제는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 가벼운 질문과 그에 따른 대답. 이 모든 행동이 서너 번 반복된 후에서야 안드레아스는 펜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눈치챘겠지만 당신을 그렸어요, 엘제."
그가 건넨 종이에는 그녀가 그려져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쓰개 사이로 보이는 얼굴. 그녀가 아니었어도 누구나 알아보았을 것이다. 종이에 그려진 얼굴은 슬퍼 보였다. 과장된 슬픔이 아니었다. 그림에 그려진 슬픔은 은은해서, 그녀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차마 알아챌 수도 없는 슬픔이었다. 엘제는 종이를 살짝 어루만졌다. 머리카락을 그린 곳을 만지자, 손가락 끝에 검댕이 묻었다.
"정말... 아름답게 그려주셨네요."
"그야 아름다우시니까요."
"그런 말씀은.."
"아뇨, 엘제. 정말 사심 없는 칭찬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저는 과장해서 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 그림엔 당신을 그대로 나타내고 싶었어요."
엘제가 살포시 웃었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파울이 있는 힘껏 달려오며 외쳤다.
"엄마!"
"오, 우리 아가."
"저랑 같이 가요, 제가 폐허에 그림을 그렸..."
파울이 말을 마치지 못하고 엘제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초상화에, 파울은 눈을 반짝거리며 종이와 안드레아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엄마를 그린 건가요, 말러 장인님?"
"감사하게도 그려주셨단다. 자, 파울도 볼래?"
파울은 종이를 받아 들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두 어른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경이로움이 가득 차있었다.
"저도.. 저도 노력하면 장인님처럼 엄마를 그릴 수 있을까요?"
안드레아스는 웃었다. "그럼, 파울. 그림을 계속 그리렴. 아버지한테 들키진 말고." 그는 풀밭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볼 때는 뮐러린 부인이겠군요, 엘제."
"가시는 건가요?"
"네, 사실.. 수도원에 지각한 참이었거든요. 더 늦으면 게르노트 수도원장님이 절 목 조르실 겁니다."
엘제는 미소를 지었다. "행운을 빌게요."
안드레아스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나중에 뵙죠. 아, 그리고 빅 요르크가 말하길 조만간 폭풍이 올 것 같다네요."
"그럼, 안녕. 파울." 파울에게 인사를 한 그는 목초지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가 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엘제의 품에 파울이 안겼다.
"엄마, 풀물 들어요."
"괜찮아, 아버지 오시기 전에 빨아두면 돼."
"...엄마. 지금 되게 행복해 보여요."
"..그래?"
"으응."
파울이 작게 웃었다. 엘제도 따라 웃었다. 타지에서 온 손님이 몰고 온 폭풍은, 언덕 위의 두 사람에게 새로운 꿈을 안겨주었다. 파울에 손에 들린 초상화가 햇살에 비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