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우리를 이끌어...'
'...세상을 다스리고 싶다는 거로군.'
'명령을 내려...'
나는 지금 가진 것보다 큰 세상은 원치 않아.
아담은 땀에 젖어 번쩍 눈을 떴다. 몸을 감싼 이불이며 시트가 축축했다.
언제 올라왔는지 '개'가 베개 옆에 앉아 아주 가늘게 낑낑대다, 제 주인이 깨어난 것을 알자 조심스럽게 코끝을 들이밀었다. 분명 주인의 곁을 지키며 모든 종류의 해악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올라왔건만. '개'는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 속 지난날을 그리워한 적이 없었으나, 자신이 사랑하고 숭배하는 주인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면 개 한 마리에 불과한 자신을 저주했다. 그것이 주인이 직접 부여한 본질임에도 그랬다. 그나마 그를 조금 덜 비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면 예전의 권능을 되찾더라도 지금의 주인을 도울 만한 뾰족한 수는 없으리라는 희미하지만 꽤 신빙성 있는 감이었다. 그는 악몽을 불러오는 존재였는지는 몰라도 악몽을 물러가게 하는 종류의 존재였던 적은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주인의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냄새를 맡고 뺨을 핥아주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리라. 그래, 착하지. 살짝 잠겼지만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은 듯한 어린 주인의 목소리가 그 감에 조금 더 확신을 심어주었다. '개'는 자신의 머리며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길을 만끽하며 눈을 감고 그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그 일'이 일어난 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여름이 끝났고 몇 개의 계절이 더 지났으며 타일러 씨의 사과나무에는 몇 개의 사과가 더 열렸다가 아이들(주로 아담)의 손에 사라졌다. 여전히 태드필드 근방을 지나는 새 고속도로가 지어진다는 소식은 없었으며 이사 오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없었다(아나테마네 앞마당에 종종 서 있는 파란색 삼륜차가 단 하나의 예외가 될지도 몰랐지만, 아직은 미래의 일이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았다. 아무도 지난 여름의 괴상했던 날씨나 공군 기지에서 있었던 군인들의 집단 최면 사건 따위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모두 그가 원한 대로였다.
어쩌면 그것이 문제인지도 몰랐다.
"오늘은 뭐하지?"
브라이언이 작대기로 산울타리를 쑤석거리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의 머리 꼭대기에 지난 겨울을 두더지굴 속이나 토끼굴 속쯤 되는 곳에서 보낸 것이 분명한 낙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스러기) 반 줌이 뿌려져 있는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 이상의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웬즐리데일이 브라이언에게 지나치게 접근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와 나란히 서서 산울타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는 캐러멜 시럽이 든 알사탕 한 개가 물려 있었는데, 나머지 세 명의 입에도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 집에 들어오겠다는 약속 후 웬즐리데일이 받아온 것이었다. 페퍼는 새로 익혔다는 물수제비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었는데, 일반적인 물수제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물 위가 아니라 땅 위로 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웬즐리데일이 그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었으나 페퍼는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던지는 자세와 힘을 쓰는 방법이며, 나중에 때가 되면 연못에서도 연습을 시작할 거라고 대답했다. 웬즐리데일은 마지막 부분에 납득했다.)
호그백 숲부터 딥까지, 채석장부터 연못까지가 아담의 세상이었다. 아담은 더 많은 것을 원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그 사실을 문자 그대로 천국과 지옥 앞에서(적어도 그 대리자들 앞에서) 선포한 바 있었다. 그는 바라는 것을 얻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잃은 적이 없고 감히 그에게서 앗아갈 자도 없었으므로 얻었다는 말에 조금 어폐가 있을지 모르나, 아무튼 모든 일이 끝난 뒤 그의 앞에는 '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이제부터 정해 가야 할 일이었다. 정확히 그전까지 하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아담은 갑자기 무언가가 변했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그의 세상은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실재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그 세상은, 이미 한번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손 ― 어쩌면, 특히 아담 그 자신의 손 ― 에 의해 금방이라도 일그러지고 깨어질 수 있는 것만 같다. 마치 지금 입 속에 있는 사탕을 혀로 누르면 얇아진 설탕 벽이 으스러지며 속에 든 캐러멜 시럽을 쏟아내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아담은 이제 11살이 지난 참이었고 세상의 존폐 말고도 신경쓸 것이 많았으므로 매일, 온종일 그런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별안간 그러한 생각을 상기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고는 하는 것이었다.
"글쎄, 뭘 할까?"
분명 수도 없이 들었을 질문이건만, 아담은 갑자기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게 향하고 있을 셋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외면한 채였다. 그가 세상을 이대로 두기로 '선택'했던 것처럼, 세상을 부수기로 선택할 수 있을는지도 몰랐다. 그가 이 세상을 선택했기에 그 세상은 그의 책임하에 들어온 것인지도 몰랐다. 마치 그가 '개'를 키우기로 결심한 대신 그를 책임지고 훈련시키기로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개 한 마리를 키우는 것과 마을과 숲과 길과 연못가를 통째로 갖는 것은 전혀 다른 크기의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그가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무언가 그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싫어도 알게 될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사실 아담은 얼마 전 아나테마에게 빌린 잡지에서 '나방 효과'라는 것을 읽었다. 아니, '나방'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날아다니는 벌레라는 것은 확실했다) 어딘가에서 바람을 타고 비릿한 냄새가 실려왔다. 언젠가 무릎이 깨졌을 때 맡았던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옆에서 개가 걱정스럽게 낑낑댔다. '그날'처럼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흔들어댔다.
그때 아담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담은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
"잘 모르겠어."
셋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지만, 곧바로 제각기 떠들기 시작했다.
"햄버거 가게에 새 메뉴가 들어왔는데, 고기 없는 패티에서 고기 맛이 난대. 먹어보러 가자."
"뭔지 알아. 전에 집에 누가 선물로 줘서 먹어봤어. 그냥 콩 맛이던걸."
"거기서 사먹은 게 아니잖아. 다른 맛일 수도 있지."
"그 옆에 아이스크림 집에 새 메뉴가 나왔다고 했어."
"뭐 먹을 거면 지금 가야 해. 저녁식사 직전에 간식을 먹고 싶지는 않아."
"꼭 뭘 먹을 필요는 없지. 아니면 오랜만에 연못으로 가 보자. 그제 비 왔으니까 올챙이가 있을지도 몰라."
아담은 토론에 열중하는 셋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조차 잊어 가고 있었던 그날의 대화를 떠올린다. 너는 태드필드를 더 좋게 만들 수 없어. 그럼 우리가 진작 알았겠지. 네가 우리에게 명령을 하겠다고?
네가 선택해, 아담.
다른 누구도 말고, 네가.
아담은 그가 이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다만 자신의 암시가 워낙 강력했던 탓에 자기 스스로조차도 그 사실을 잊어 가고 있었을 뿐이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기억하지 않기로 한 것을 아담 역시 모두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걱정의 파편도 모두 사라질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느낌이 상쾌했다. 아까와 같은 비릿한 풋내가 스쳤다. 덜 익은 사과를 쪼개면 나는 냄새와 닮아 있었다. 주인의 기분 변화를 눈치챈 개가 헥헥대며 꼬리를 흔들었다. 페퍼가 물었다.
"아담, 한 마디도 안 했잖아. 맘에 드는 거 없어? 고르기라도 해 봐."
"아니면 제비뽑기로 정하자."
"제비가 없잖아."
"아니면 가위바위보?"
아담의 얼굴에 평소와 같이 장난기 어린 영민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동전 던지기와 가위바위보 중 무엇이 더 나은 결정 방법인지 잠시 헤아려 보다가 다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갈 것인가, '햄 없는 햄버거'를 먹어 볼 것인가, 연못이나 사과밭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갈 것인가를 두고 맹렬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말을 들음과 동시에 최고의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좋을지 나름대로 계산하느라 아담의 어린 두뇌가 핑핑 돌았다.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왕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무언가를 고르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사실 그의 어떤 선택도 온전히 그 혼자만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비록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애초에 그는 왕을 쳐부수는 자였지 왕이었던 적은 없었다.
